록 스타 무료보기

영화정보
  • 록 스타 무료보기
  • 코미디
  • 2001
  • 미국
  • 스티븐 헤렉
예고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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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평 1
텐더' 가사 번역해주시고 록 스타 '러브 미
그 노래 부르게 된 배경과
앨비스 프레슬리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 주세요
감상평 2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let me go. 록 스타 never
You have made my life complete,
and I love you so.
부드럽고
달콤하게 사랑해 주세요
록 스타 날 떠나게 하지 말아요
내 삶을 온전하게 해주신 당신
그래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Love me tender,
love me true,
all my dreams fulfilled. 록 스타
For my darlin' I love you,
and I always will.
부드럽고
진실로 사랑해 주세요
내 모든꿈이 이뤄져요 록 스타
내사랑, 내가 사랑하는 당신
그래서 영원히 사랑합니다
Love me tender,
love me long,
to your heart. 록 스타 take me
For it's there that I belong,
and we'll never part.
Love me tender,
love me dear,
me you are mine. 록 스타 tell
I'll be yours through all the years,
till the end of time.
부드럽고
오래오래 사랑해 주세요
록 스타 마음 깊숙히 날 간직해줘요
내 머물 곳 바로 그곳이기에
그래서 우린 헤어지지 않습니다
(When at last my dreams come true
Darling this I know
록 스타 Happiness will follow you
Everywhere you go).
부드럽고
귀하게 사랑해 주세요
당신은 내사랑이라고 내게 말해줘요
록 스타 이 세상 끝날까지
난 항상 당신의 사랑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로큰롤의 황제, Elvis Presley
1958년 3월 24일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23세의 나이로 군대에 징집된 날이다. 해외 스타들은 별 핑계 안 만들어 내고 쉽사리 군대에 가는구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엘비스는 흑인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R&B 사운드를 로큰롤에 도입, 접목시킨 새로운 스타일로 수많은 명곡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학교 졸업 이후,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중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자신의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당시 일반인들에게 녹음 스튜디오 대여 서비스를 했던 [선 레코드(Sun Records)]를 찾으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그의 독특한 보컬에 매혹당한 스튜디오 매니저가 사장 겸 프로듀서인 샘 필립스(Sam Philips)에게 그를 추천했고, 곧 'That's All Right(Mama)'와 'Blue Moon Of Kentucky'가 담긴 첫 싱글을 발매하기에 이른다. 순회공연에 나선 그의 섹시하고 정열적인 무대매너는 금새 많은 사람을 유혹했다. 그의 성적인 제스추어에 대해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의 상업적 가능성을 알아챈 메이저 레이블 [RCA]를 통해 1956년 'Heartbreak Hotel'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8주 연속 차트 정상을 차지한 싱글에 힘입어 공영방송에도 출연한 그는 TV마저 무릎꿇게 만들었다. 다시 정상을 차지한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 이후 그는 더블 싱글 'Hound Dog/Don't Be Cruel'로 11주 동안 US 차트 정상에 눌러 앉는다. 영화 [Love Me Tender]로 박스 오피스 기록을 세운 그는 동명의 타이틀 트랙을 5주 연속 US 차트 정상에 등극시켰고, 이후 [Loving You], [Jailhouse Rock], [King Creole]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들은 그의 군 복무기간 동안 개봉되어 여러 개의 히트 싱글과 더불어 2년 여의 활동 공백기간을 메워주었다. 제대 후 그는 이탈리아 가곡 'O Sole Mio'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It's Now Or Never'를 발표했고 이어 'Are You Lonesome Tonight?', 'Wooden Heart', 'Surrender' 등의 곡들을 히트시켰다. 그 후 몇년간 [Flaming Star], [Wild In The Country], [Blue Hawaii], [Follow That Dream], [Kissin' Cousins]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사운드 트랙 앨범을 발표했다. 그러는 사이 비틀즈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의 무분별한 영화 출연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을 가중시켰다. 60년대말 그는 라스베가스 무대를 통해 다시 라이브 뮤지션으로 돌아오는데 라이브 실황 'The Wonder of You'를 UK 차트 정상에 진입시켰고, 이어 라이브 다큐멘터리 영화 [That's The Way It Is]를 발매한다. 그러나 슬럼프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점점 더 약물의존도가 높아지던 프레슬리는 결국 1977년 8월 16일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간접적인 원인은 비만과 약물 과용이었다.
oimusic 2003년 03월 양중석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가수, 그 중에서도 틴 아이들 스타를 영화계에서 끌어들이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로큰롤의 황제이기 이전에 그 섹시한 외모로 청춘의 우상이요 ‘캘린더 보이(!)’였던 엘비스 프레슬리(1935.1.8-1977.8.16) 역시 그런 유혹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느 청춘 스타도 영화판에서 엘비스 만큼의 성공을 구가하지는 못했다. 그는 무려 31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특히 전성기에 ‘몰아찍기’ 했던 영화들은 자연히 영화 자체로서의 완성도는 떨어지는 것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은 성공적이었고(영화들은 대부분 그의 팬층을 겨냥해 만들어졌다) 음악 역시 좋은 것들이 많았다. 영화 사운드트랙에 록 음악이 사용된 것이 그의 작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영화에서 음악의 기능에 비중을 두게 만든 것은 그의 공로이며 또한 지금까지도 유효한 10대들만의 시장을 형성하게 한 것 또한 그였다. 록 스타 스파이스 걸스라든가
당시 시작된 로큰롤 붐을 타고 첫 싱글 ‘That's All Right, Mama’으로부터 히트 행진이 시작되자 할리우드는 재빨리 그를 끌어들였고 매니저는 [20세기 폭스], [파라마운트] 등 여러 영화사들과 마구 출연 계약을 체결했다. 1956년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의 히트와 함께 같은 제목의 싱글이 차트를 강타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화와 음악의 동거는 순탄하게 이어져갔다. [Jailhouse Rock](1957) 등에 이어 그는 군 생활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1960년 [G.I. Blues]의 대성공으로 화려한 컴백을 했고 공연 보다는 영화와 사운드트랙 레코딩에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여 거의 한 해에 두 세편씩의 영화를 양산해냈는데 대부분의 영화들이 거의 유사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을 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0녀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그의 시대도 지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A Change Of Habit](1969)를 끝으로 영화배우로서의 경력은 막을 내렸다.
1. The Trouble with Girls (And How to Get into It) 1969년
2. Charro! 1969년
3. Change of Habit 1969년
1968년 록 스타 4. Speedway
5. Stay Away, Joe 1968년
6. Live a Little, Love A Little 1968년
7. Clambake 1967년
8. Easy Come, Easy Go 1967년
9. Double Trouble 1967년 록 스타
10. Paradise, Hawaiian Style 1966년
11. Spinout 1966년
12. Frankie And Johnny 1965년
13. Girl Happy 1965년
Me 1965년 록 스타 14. Tickle
15. Harum Scarum 1965년
16. Roustabout 1964년
17. Kissin' Cousins 1964년
18. Viva Las Vegas 1964년
록 스타 19. Fun In Acapulco 1963년
20. It Happened At The World's Fair 1963년
21. Girls! Girls! Girls! 1962년
22. Blue Hawaii 1962년
23. Kid Galahad 1962년
That Dream 1961년 록 스타 24. Follow
25. Wild In The Country 1961년
26. Flaming Star 1960년
27. G.I. Blues 1960년
28. King Creole 1958년
29. Jailhouse Rock 1957년 록 스타
30. Loving You Actor 1957년
31. Love Me Tender 1956년
oimusic 2003년 04월 원용민
흑인 음악을 도입해 히트시킨 최초의 백인 아티스트
감성을 지닌 백인 가수를 찾는다면 수십억 달러는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다." 록 스타 "만약 흑인의 목소리와
유명한 [Sun] 스튜디오의 사장이며 로큰롤 시대를 빛낸 프로듀서 샘 필립스(Sam Phillips)의 말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바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B.B. 킹, 하울링 울프 등의 흑인 블루스 음악을 듣고 자란 엘비스는 그들의 감성과 목소리에 차츰 동화되어 갔고 한편으로 수많은 백인들을 사로잡을 야성미, 다른 이름으로는 섹스 어필을 지니고 있었다.
대체로 빌 헤일리의 'Rock Around The Clock'이 히트한 1955년을 그 시초로 보고 있는 이 로큰롤은 다른 대부분의 팝 음악 장르가 그러하듯이 흑인 음악을 모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로큰롤이 백인들의 지지를 얻는데는 흑인 뮤지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이 요구를 충족시켜준 것이 엘비스 프레슬리인 것이다. 여러 잡다한 음악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있긴 하지만 크게 보아 흑인 음악인 리듬 앤 블루스와 백인 음악 컨트리가 이종 교배된 혼혈 장르 로큰롤에 흑인의 감성을 가진 백인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만큼 잘 어울리는 뮤지션이 어디 또 있겠는가...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줄 레코드를 녹음하기 위해 선 레코드를 찾았던 그는 사장이었던 샘 필립스의 눈에 띄어 'That's All Right(Mama)'와 'Blue Moon Of Kentucky'가 담긴 싱글을 발매하게 된다. 성적인매력이 묻어나는 외모, 그리고 유연한 하체 놀림으로 '골반'을 의미하는 '펠비스'라는 비난을 얻기도 한 그는 1956년 'Heartbreak Hotel'을 8주 연속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려놓으면서 화려하게 자신의 시대를 열게 된다. 가수로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수많은 영화에도 모습을 드러냈고 군복무로 인한 공백기를 가진 뒤에도 히트 행진을 계속하게 된다. 최후의 빌보드 넘버원 곡 'Suspicious Mind'(1969년) 이후 인기는 뚜렷한 하강 곡선을 그렸고 1977년 8월 16일 결국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숨진 뒤 25년이 지난 2002년, 네덜란드 출신 JXL이 리믹스한 그의 'A Little Less Conversation'이 다시 영국 차트 1위에 오르며 다시 그에게 집중 조명이 비춰지게 되었고 사망 25주기를 맞아 넘버 원 히트곡을 모은 음반 또한 발매되었다.
20세기 미국이 낳은 위대한 팝 뮤지션중의 하나인 그는 흑인 음악을 도입한 외에도 백인 중산층 10대들을 팝 음악의 주요 소비층으로 끌어들인 커다란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가 모습을 나타내던 무렵, 기성세대는 제임스 딘과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기고 가죽 재킷을 입은 10대들의 모습에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고 하니...
록 스타 oimusic 2003년 03월
죽어서도 살아있는 황제 엘비스. 지금도 멤피스에 있는 엘비스의 저택 그레이스랜드에는 세계 각국의 엘비스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그의 묘소에는 꽃이 시들 틈이 없다. 그의 사망일(1977년 8월 16일)을 기념해 엘비스 모창대회 등의 각종 행사가 매년 벌어지고 있는 등 그레이스랜드는 관광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한 마디로 엘비스는 미국인들의, 아니 전 세계의 팬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고, 실제로 아직도 엘비스가 살아있다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꾸며져 나돌기도 한다.
흑인들의 음악 R&B를 로큰롤에 결합시켜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낸 그는 어머니 생일 선물로 노래를 선물하기 위해 [선 레코드(Sun Records)]를 찾았고 이것이 그의 인생이 전환점이 되었다. 레코드사 사장의 눈에 띄어 ‘That's All Right(Mama)'와 ‘Blue Moon Of Kentucky'가 담긴 싱글을 발매한 그는 곧 성적인 매력이 물씬 품어나는 외모, 그리고 유연한(?) 하체 놀림으로 수많은 여성들을 녹여내었다. ‘엘비스가 아니라 펠비스(주:골반을 의미하는 ‘pelvis’를 갖다 붙여 그의 외설적 무대 매너를 비아냥거린 말)’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팬들은 그의 편이었다. 결국 이후 줄곧 엘비스의 음반을 발매하게 되는 메이저 [RCA]를 통해 1956년 ‘Heartbreak Hotel'을 8주 연속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려놓으며 그의 화려한 시대는 개막이 된다 ‘I Was The One’(19위)과 ‘Blue Suede Shoes’(20위) 등의 히트 싱글에 이어 두 번째 빌보드 팝 싱글 차트 1위곡인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 이후 연속 히트를 이어간다.
그는 가수로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고 이들은 튼튼한 팬층을 기반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대성공을 거둔 [Love Me Tender] 이후 [Loving You], [Jailhouse Rock], [King Creole] 등 그가 출연한 영화들은 특히 1953년 군대에 들어간 그의 공백기 동안 그의 존재를 팬들의 기억 속에 머물게 해주었고 2년여의 공백기 끝에 다시 돌아온 그는 ‘It's Now Or Never’로 화려하게 컴백하는데 이 곡은 바로 이탈리아 민요 ‘O Sole Mio’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
이후에도 그의 히트 행진은 계속되었고 영화 쪽도 [Flaming Star], [Wild In The Country], [Blue Hawaii], [Follow That Dream], [Kissin' Cousins] 등 수많은 작품에 계속 얼굴을 내밀었지만 차츰 영화 출연에 팬들이 식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영국 청년들 비틀즈가 미국 땅을 휩쓸 동안 엘비스는 다소 실험적인 음악을 사이키델릭하고 소울풀한 음악들을 실험하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였다. 그의 최후의 빌보드 넘버원 곡인 ‘Suspicious Mind’가 발매된 것이 1969년의 일. 이후 발표된 곡들중 우리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은 1972년 차트 2위에 오른 ‘Burning Love’ 정도다. 록 스타 하지만 역시 엘비스의 전성기는
결국 1977년 8월 16일. 로큰롤의 황제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과도한 약물 복용이 원인으로 추정될 뿐, 사망 소식은 신격화된 그의 존재감과 맞물려 수많은 추측을 낳았다.
그리고 그의 사망 25주기를 두어달 앞둔 지난 6월 엘비스가 또 다시 차트 1위를 점령했다. 물론 미국 차트는 아니지만. 죽은 엘비스가 어떻게 차트에 올랐냐고? 바로 네덜란드 출신 댄스 팀 JXL(원래 이름은 Junkie XL이었지만 안 좋은 이름을 가진 팀이 엘비스의 곡을 리믹스할 수 없다고 하여 'Junkie'를 ‘J’로 바꾸었다고...)이 리믹스한(정확히는 톰 홀켄버그(Tom Holkenburg) 리믹스) 엘비스의 ‘A Little Less Conversation’이 영국 차트 1위에 오른 것이다. 이 곡은 영화 [Live A Little, Love A Little](1968) 삽입곡으로 1961년에서 1966년 사이의 레코딩을 모은 [Almost In Love](1970) 앨범에 실려있던 곡으로 1968년 발표 당시에는 차트 69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던 곡이지만 새로운 버전의 리믹스 덕에 큰 반응을 얻은 것. 엘비스의 원곡은 조지 클루니 등이 나왔던 영화 [오션스 일레븐]의 사운드트랙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이로써 엘비스는 모두 18곡을 영국 싱글 차트 1위에 올려놓게 되었고 영국 시장에서는 17곡의 1위곡을 가진 비틀즈를 앞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구세대의 우상이었던 엘비스가 신세대들에게도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
oimusic 2002년 10월 원용민
1954년에서 1956년 사이, 빌 헤일리(Bill Hailey)는 'Rock Around The Clock', 'Shake Rattle & Rock' 그리고 기타 십여 곡의 'Rock'자 단어 들어가는 노래를 발표해 총 2천 2백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팔아치웠다. 영화배우 겸 핀 업(Pin-Up) 스타 제임스 딘(James Dean)이 1955년 10월에 돌연 사망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로사 팍스(Rosa Parks)가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내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라고 윽박지른 백인 남성의 요구를 거절한 일로 인해 체포되는 사건이 발발했고, 이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흑인 인권 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암울한 기억이 차츰 사그러들고, 경제가 살아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보다 느긋해 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A Celebration]에 기술했듯, 더 이상 완벽한 타이밍은 존재하기 힘들었다. 서방 세계 국가들 특히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미 자신이 써도 좋을 용돈의 범위를 충분히 상회한 금액을 그에게 쏟아 부었다. 또한 그를 통해 진정한 자유의 의미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나갔다. 심지어 언론 매체마저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른 바 ‘10대(teenager)’라는 호칭이 바로 그것이다. 록 스타 마이크 에반스(Mike Evans)가 그레이스랜드(Graceland) 산하의 유산으로 편입될 새로운 책 [Elvis: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케팅을 위해, 업계에 의해 다듬어지고 육성된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자연 발생적인 존재이다. 1935년 1월 8일, 미국의 딥 사우스(Deep South), 미시시피 주 투펠로(Tupelo)에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랐다. 툭하면 백수 생활을 전전했던 그의 아버지 버넌(Vernon)이 파치맨(parchman) 농장의 일용잡부로 일해 벌어오는 고작 4달러 정도의 일당이 그들 가족의 수입 전부일 때도 있었다. 프레슬리의 쌍둥이 형제가 출산 도중 사망한 까닭에 그는 가족 중 유일한 소산(所産)이었다. 1948년 멤피스로 이주해 오면서 비로소 사람 사는 것 같은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고 전한다. 미국 정부가 주도한 '로더데일(Lauderdale) 프로젝트'는 그들 가족에게 번듯한 아파트 한 채를 제공해 주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수줍음많은 소년으로 자랐고. 그런 그에 대해 어머니 글래디스(Gladys)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과잉보호로 일관했다. 하지만 엘비스의 11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고자 선물한 중고 기타는 이후 그의 삶을 180도 변화시키는 전환점 역할을 했다.
아직 집에서건 교회에서건, 그저 가스펠 음악 노래하는게 마냥 좋은 정도의 소년 시절을 보내는 것에 불과했으나. 점차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따라 부르는 쪽에 취미를 붙여 나갔다. 특히 온몸을 내던져 격렬한 무대 매너를 선보이며, 그는 내시빌의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ly) 쇼]에 심취했고, 지역 라디오 방송 [WHBQ]를 통해 다양한 블루스와 R&B 음악을 청취했다. 너무나도 당돌하게도 그는 이 즈음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의 음악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16살부터 18살 사이, 그는 외모에서마저 완전 대변신을 단행했다. 무미건조한 시골뜨기 금발 소년이 일약 때 빼고 광낸 멋쟁이가 되었다.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 광채가 흘렀고 멋진 흑발로 염색한 상태였다. 예술대 출신 박사라도 된 듯 단정하게 커트해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까지. 온통 흑인 주민들로 득실대는 빌가(Veale Street)에 위치한 [랜스키(Lansky)] 양복점에 들러 최신 유행의 의상도 구비했다. 감히 그 동네에 사는 다른 백인 애들은 엄두도 못 낼 옷들로 말이다. 헐렁한 최신 유행 정장과 붉은색 혹은 초록색의 현란한 색상을 자랑하는 장식용 목걸이, 벨벳 셔츠, 줄무늬 바지, 흰구두, 꽃 분홍색 셔츠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특유의 비웃는 듯한 미소도 부단히 연습했다.그것은 분명 (여성 팬들에게) 매우 매혹적인 동시에 (남성들에게는) 조금 짜증나는 것이었다.
처음엔 무지 수줍어 보이더니, 점차 그는 활달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마찰도 많아졌다. 썩은 과일을 집어던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같은 고등학교 애들 가운데에는 그를 무력으로 붙들어 머리를 다 잘라내 버리려 한 강경파도 있었다. 물론 그는 일체의 위협과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달린 사람 앞에서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는데 주력했다. 1년을 꼬박 칭얼대고 조르더니, 그는 마침내 [선(Sun)] 레코드의 경영자 선 필립스(Sun Phillips)가 그와 음반 제작 계약을 체결하도록 설득해 냈다. 1954년에 그가 남부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에 주력하고 있을 때, 이를 목격한 한 호의적인 비평가는 그를 '남부 민요 스타일로 노래하는 고양이'라 칭했다. 그가 흑인 정통 재즈에 입각한 R&B 스타일로 노래한 까닭에서 그랬다고 한다. 그의 그런 행태에 목 언저리까지 새빨개지도록 분노해마지 않았던 극소수의 강경 반대파들은 그를 '하얀 흑인(white nigger)'이라 불렀다. 물론 프레슬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니 오히려 무척 행복해 하며, 이런 주장들에 대해 동감을 표시했다. 록 스타 게다가 그는 귀
“바로 그 유색 인종들이 바로 내가 하고 있듯, 오랜 세월 노래 불러왔죠.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해 왔지만. 내가 나서기 전까진 아무도 그런 것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한 거죠.”
숱한 소녀 팬들의 경악과 환호 속에서 그는 스타로 재 탄생했다. ’40년대 후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를, 혹은 ’50년대 초 조니 레이(Johnny Ray)를 추종했던 사춘기 소녀들과 다를 바 없는 광신도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소녀들이 전에 비해 더 시끄럽고, 덜 낭만적이며, 매우 난폭하다는 것 뿐.
작가 피터 구럴닉(Peter Guralnick)이 그의 두 권 짜리 전기 [Last Train To Memphis]와 [Careless Love]를 통해 말하길, 프레슬리는 종종 무대 위로 달려나가곤 했다고 한다. 흡사 고속으로 질주하는 기차에 떨어져 퉁겨나간 사람처럼. 프레슬리의 기타리스트 스코티 무어(Scotty Moore)는 그가 무대에 섰을 때, 단 한 순간도 정자세로 서 있었던 적이 없었단다. 기본적으로 쉴 새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헐렁한 바지 안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짐작하기 힘들 정도의 자세로 양 다리를 벌린 채 온 몸을 흔들어댔다.
관객석 앞 열에 위치한 소녀들은 거의가 다 흐느끼며 울부짖고 있었다. 자리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는 상태고. 소녀들은 비명을 지르다 졸도하기 일수였고, 더러는 거품을 문 채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빌 헤일리의 클리블랜드(Cleveland) 공연에 동반한 엘비스가 무대에 올랐을 때, 팬들의 주된 관심은 진작부터 엘비스에 쏠려 있었음이 새삼 증명되었다. 특히 그가 (물론 역사상 최초로) 무대 위에서 기타를 때려 부수는 상황을 연출했을 때, 그 상태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백 스테이지를 묘사한 [라이프] 잡지의 보도 내용을 살펴보자. 록 스타 그의 호주 공연
10대 소녀 여럿이 평판 유리로 된 창문 틈으로 온 몸을 밀어 넣고는 그에게 자신들의 팔뚝에 사인 해 줄 것을 요구하기가 일수였다고 했다. 심지어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부위에 이르기까지. 한편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대기실 문을 열고 나온 평론가를 발견한 소녀들은 이렇게 외쳤다. “저 사람을 붙잡아서 몸을 비벼! 엘비스와 접촉했을 지 몰라!”
그의 포트 워스(Fort Worth) 공연 당시에는, 일군(一群)의 소녀들이, 흡사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Manic Street Preachers)의 리치 에드워즈(Ricjey Edwards)의 경우에서처럼, 자신들의 팔뚝에 엘비스의 이름을 새겨 넣으려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핏방울을 튀기면서 그 중 한 소녀는 지역 신문 기자에게 말했다.
“그는 나를 침실로 유혹하는 매력적인 눈동자를 지니고 있고 입술은 너무나 섹시해 하루 종일이고 키스를 하고 싶게 만들어요.”
프레슬리는 그 모든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또 잘 활용하고 있었다. 팬들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흡사 본능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소녀들이 가장 큰 비명소리를 내는 동작들을 되풀이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단호히 다시는 써먹지 않을 정도의 영민함을 지니고 있었다. 조니 캐시(Johnny Cash)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결혼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이 촌 소년은 말했다. ‘담장 너머에서도 충분히 젖을 짜낼 수 있는데, 뭐 하러 구태여 암소를 구입하겠습니까?’” 록 스타 “엘비스가 미국 남부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할 때, 그는 공연 전 무대에 드리워진 커튼 틈으로 관중들을 엿보며, 그 중 한 명을 지목하더니 ‘저 여자, 오늘 밤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겠어.’했다는 것이다. 물론 실패 확률은 0%에 가까웠다.
엘비스는 그에 대해 혹평하는 기자들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를 두고 '수많은 소녀 팬들에 둘러싸여 팝 음악을 단지 그를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이 활개치는 저급한 수준으로 끌어내린 장본인'이라 욕하는 기사도 등장했다. 이와 비슷하게 그는 앨라배마 주 버밍엄(Birmingham)에 근거지를 둔 '백인 시민 평의회(White Citizen council)}가 그에 대한 공개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며 공연장 밖에서 시가 행진을 벌인 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당연히 그의 공연에 가지 않아야 한다’, ‘부모님께 가서 그가 들려주는 난잡한 음악들에 대해 의논을 해보라’와 같은 메시지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엘비스는 자수성가 형의 인물이다. 잘 나가던 육군 대령 출신인 톰 파커(Tom Parker)가 1955년에 새롭게 그의 매지니먼트를 맡게 되면서 야심차게 시작한 일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그를 이제껏 어떠한 팝 스타도 서본 일 없는 큰 무대에 세우는 일이었다. 물론 엄청난 화제를 일으키며 그의 음반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파커는 그가 가진 섹스 폭탄의 이미지를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시키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는 엘비스를 냉혹하리 만큼 혹사시키며 투어 강행군에 나섰다. 결국 그는 애초 그가 목적했던 대로 엘비스를 미 전역에 송출되는 TV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에 출연시켰다. 12개월 사이, [도시 브라더스(Dorsey Brothers)]에 6번, [스티브 앨런(Steve Allen)]에 한 번 그리고 [에드 설리번(Ed Sullivan)]에 세 번씩 출연할 수 있었다.
파커의 '엘비스 우상화'는 1956년 9월 9일, 정점에 달했다. 프레슬리가 [에드 설리번]쇼에 첫 선 뵌 그날, 시청자가 5,400만 명을 선회했다는 경이로운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는 미국 내 TV 보유 가구 가운데 82%에 육박하는 수치다. 이는 홍보의 승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의 '도덕성' 실추 여부를 제기하는 익명의 시청자들의 항의로 인해 이후 그가 출연한 장면들이 난도질 당하는 사태를 촉발시켰다. 국가 안전상의 이유에서 그런 조치가 취해졌다고 한다. 결국 그가 TV 출연해 공연하는 장면을 상반신만 클로즈업 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하반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도통 알 길 없어진 것이다.
엘비스가 끼친 영향력(Elvis Effect)은 영국 땅에서도 매한가지였다. 다만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좀 더디었다는 점이 다를까. [선]레코드를 통해 출시한 싱글을 영국에서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그가 알려지지 못 했고 그래서 투명인간 상태였던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는 그가 [RCA]로 이적하면서 자연스레 해결된 문제였다. 1956년 5월 발표한 'Heartbreak Hotel' 싱글이 영국의 레코드 가게에도 진열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의 라디오 방송은 [룩셈부르크(Luxembourg)] 방송국이 내보내는 불규칙한 시그널을 그대로 수신해 재송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TV는 너무 점잖아 도통 로큰롤을 수용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신문은 중년층을 위한 기사들로 가득했다.
그 고요함을 휘저어 부수었다. 14년 만인 1954년에 이르러 식량 배급제가 종식되었다. 미국의 상황과 마찬가지고, 영국의 경제 상황도 날로 좋아지고 있었다. 실직자의 수치가 26만 6천명 정도로 급감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2%에 불과한 수치다. 바로 그런 와중 'Heartbreak Hotel'이 출시된 것이다. 록 스타 그러나 이윽고 무언가가
당시 16살에 불과했지만, 조만간 자국 출신 록 스타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에 대적해 영국 차트 정상을 다투게 될 이 미지의 스타를 첫 눈에 알아본, 마티 화이트(Marty White)는 이렇게 회고한다.
“전국적으로 낙관주의가 팽배했던 때였어요. 더 좋은 세상이 찾아오리라는 느낌이 있었죠. 이런 분위기는 ’60년대의 비틀즈와 카나비(Carnaby) 가로 이어졌죠. 라거(lager) 맥주가 수입되기 시작했죠. 전 제가 처음으로 볼로네즈(Bolognese) 스파게티를 먹은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노동자 계급 소년이 그런 일들을 경험했다는 건, 당시로써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거든요. 젊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죠. 전쟁이란 근심스러운 시간을 겪어낸 부모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자녀를 훈육함에 있어 엄격한 규율을 강조함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가 이미 너무나 지쳐있었고. 평화와 고요함을 추구했죠.”
하지만 젊은이들이 전정 원한 것은 다름 아닌 로큰롤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10대 비행 청소년을 소재로 한 영화 [The Blackboard Jungle]에 삽입된 빌 헤일리 앤 더 커미츠(Bill Hailey And The Comets)의 'Rock Around The Clock'은 바로 이런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곡이었다.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지로부터 '리듬에 광분한 젊은이들'이란 평을 받아낸 악명 높은 이들, 테디 보이스(Teddy Boys)는 단지 이 노래를 몇 번 더 듣기 위해 영화관을 여러 번 찾았을 정도다. 객석 사이 복도로 뛰쳐나와 춤추고, 좌석 위에 올라가 무시무시한 면도날을 휘두르며 망나니 짓을 하기도 했고.
결국이는 로큰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을 충동질했고, 의로운 분개심을 폭발시켰다. 노팅엄(Nottingham)의 앨버트 카터(Albert Carter) 목사는 예배 설교 도중 신도들에게 로큰롤은 악마의 춤이라 표현했다. “그것은 난잡한 성 관계를 조장해 자신의 음흉한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낼 것이며, 무법천지를 조장하고, 심리적 불안정 상태를 초래할 뿐더러 결혼의 신성함을 파괴할 것이다.”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을 정도다. 한편 [멜로디 메이커]지의 스티브 레이스(Steve Race)는 억지를 쓰며 말했다.
미래가 어느 특정 세대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잠식될까 심히 두렵다. 난 이 나라 사람들에서 그런 퇴폐적인 음악을 가려내고 거절할, 훌륭한 음악적 취향과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든 것에 통탄해 하고 있다.” 록 스타 “나는 음악 산업계의
그러나 일단 프레슬리에게서 고삐가 풀리고 나자 그를 저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이 섹스이건 젊은이의 반항이건 말이다. 1956년 5월에서 1957년 12월까지 그는 자그마치 21곡의 싱글을 차트 톱 30위 안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그 중에는 'Blue Suede Shoes', 'Hound Dog' 그리고 'Love Me Tender'와 같은 곡이 포함되어 있다.
분홍색 그리고 초록색 의상을 입은 엘비스의 이미지는 후일 클래시(The Clash)에 의해 카피되기도 했다. 광 팬 와일드(Wilde)의 말을 들어보자.
“그의 첫 앨범은 정말 제게 너무나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제껏 들어본 가운데 가장 신선한 것이었고 또 소울풀(soulful)했죠. 기저에 흐르는 반항심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근 1년 간이나 아버지와는 담 쌓고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살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육군 하사관이셨죠. 늘 스포츠 머리에 다림질 선 확실하게 난 바지를 입으셨고 구두도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광내서 신으시던 분이니. 그에 비하면 전 히피족인데다가 하수구 같은 생활을 했죠. 그전까지는 늘 부드럽고, 낭만적인 노래들 천지였어요. 하지만 엘비스 덕분에 실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노래를 가지게 된 겁니다. 'Money Honey' 그리고 'Good Rockin' Tonight' 같은 곡이 바로 그런 주제를 담고 있었어요. 성에 대해 솔직하고도 음흉한 입장을 취한 곡이요. 'Don't Be Cruel'은 그저 대화나 나누자는 노래가 아닙니다. 여자와 동침 중인 엘비스가 상상되는 곡이죠. '넌 날 가지겠지만 그래도 난 네가 싫어!', 뭐 이런 식이죠. 그의 노래는 기성 세대의 관점에서 보아 너무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들이었고 또 너무 생생했어요. 지극히 남성적이었죠. 그는 젊은 남성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던 '이상적인 존재'였어요. 그는 그의 진가를 잘 알고 있었죠. 제가 싸구려 차 몰고 다닐 때, 분홍색 캐딜락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몰고 다녔고요.
“소녀들은 엘비스 프레슬리로 인해 성적으로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56살 된 프레슬리의 팬 모임 [Elvisly Yours] 멤버 시드 쇼(Sid Shaw)가 말한다. “그들은 그로 인해 매우 흥분했고, 절정감을 맛보곤 했죠. 통제력을 상실한 거죠. 약물을 복용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프레슬리 자체가 최고의 흥분제였으니까. 그는 최초의 진짜 펑크(punk) 족이죠. 부모들은 당연 그를 미워했고. 애들은 반항했죠. 마침내 우리만의 목소리를 갖게 된 겁니다. 엘비스는 우리 스스로 알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줬습니다.”
밝힌 바 있다. 밥 딜런은 'That's All Right Mama'가 견지한 감수성과 힘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에드 설리번]쇼에 출연해 공연하는 프레슬리를 본브루스스프링스틴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심지어 모리시(Morrissey)마저 그의 침실 벽에 엘비스의 포스터를 붙여 놓고 살았다. 록 스타 엘비스가 영감을 불어넣은 이들 중 일부는 다음 수 세대에 걸쳐 로큰롤을 이끌었다. 존 레넌은 [라디오 룩셈부르크]를 통해 흐르는 'Heartbreak Hotel'을 듣고 “그 후 나의 인생이 총체적인 변화를 일으켜 전과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음악에 사로 잡혀, 열과 성을 다해 노래하고 (우아한 죽음을 맞이 했던) 그는 분명 로큰롤에 섹스를 접목시킨 인물이다. 1956년에 무대에 선 그는 당시의 여자친구 준(June Juanico)에게 말했다. “온몸이 전율하고 있구나. 추워서 그런 건 아닐 텐데. 흡사 전기에 감전된 듯 말이야. 연인이 사랑을 나눌 때 같겠지? 하지만 내 음악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지. 때론 내 심장이 펑 하고 폭발해 버릴 것 같아.”
전에, 한 평론가가 그와의 인터뷰 도중 '대체 소녀들이 그에 대해 열광하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아마 그 또한 신이 주신 선물일 겁니다. 전 그렇게 믿어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제가 두려워 하는 게 있다면, 흡사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갑자기 들어왔다가 갑자기 꺼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거죠.”
oimusic 2002년 10월 Q특약
프레슬리 록 스타 소울 창법으로 노래한 최초의 백인 싱어, 엘비스
엘비스 프레슬리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미시건 주 출신의 빌 헤일리(Bill Haley)가 그의 백업 밴드 커미츠(The Comets)와 함께 부른 로큰롤의 고전 'Rock Around The Clock'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곡은 1955년 당시 [빌보드] 차트에서 8주간이나 정상을 지킬 정도로 그 여파가 대단했다. 빌 헤일리는 이미 그 전부터 'Crazy, Man, Crazy' 그리고 'Shake, Rattle & Roll' 등을 히트시키며 컨트리 음악도 아니고 리듬 앤 블루스 사운드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의 귀를 거슬리게 한 바 있긴 했다. 하지만 보다 컨트리 음악 쪽에 가깝고 더러는 빅 밴드 스타일의 스윙 음악을 구사했던 그이기에, 'Rock Around The Clock'이 선사한 본격 하이브리드(hybrid) 사운드는 더욱 큰 반향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본디 미시시피주 출신이지만 멤피스 빈민가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엘비스 프레슬리이기에 남달리 미국 남부 지방의 음악 양식-블루스, 컨트리, 가스펠-들을 풍성하게 섭취할 수 있었을 듯 싶다. 트럭 운전수 생활을 하며 어머니에게 생일 선물로 드릴 노래를 녹음하러 [선(Sun)] 스튜디오에 들르면서 그의 새로운 경력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어쨌든 그가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철부지 막내 아들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는 20세기 말 팝 음악 신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에미넴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다. 에미넴 역시 소위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라 불리는 무주택 유랑민 생활을 전전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일지 모르겠다. 그 기회란 것이 극소수에게만 주어진다는 점이 문제이긴 하지만.
특히 블루스와 컨트리를 믹스한 로커빌리(Rockabilly)라는 장르를 선보였고, 대공황기를 겪으며 피폐해진 미국인들에게 슈퍼맨 이상 가는 꿈과 희망, 위로와 대리 만족을 선사한 것이 사실이다. 마침 흑인의 필이 나는 보컬을 소유한 백인 아티스트를 찾고 있던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Sam Phillips)의 적극 후원 하에 정식 데뷔하고 싱글을 발매했다. 아더 크루덥(Arthur Crudup)의 블루스 고전 'That's All Right Mama'가 바로 그것이다. 이후 'Blue Moon Of Kentucky', 'Good Rockin' Tonight', 'Baby Let's Play House' 그리고 'Mystery Train'과 같은 싱글이 연이어 사랑받기 시작했고, 지금껏 초기 록 음악사에 길이 남을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더블 사이드 싱글로 발매된 'Forgot To Remember Forget / Mystery Train'은 1955년 전미 컨트리 싱글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선] 레코드가 메이저 레이블 [RCA]에 매각, 합병되면서 그의 음악에도 작지만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보다 팝적 정서에 치중한 곡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는 어서 성공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엘비스 본인으로부터 연유한 것이기도 하지만, [RCA]가 내린 내부 지침도 그러했다. 명 프로듀서 딘 마틴(Dean Martin)과의 밀월이 지속된 몇 년간 'Heartbreak Hotel',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 'Hound Dog / Don't Be Cruel' 등이 다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결정적으로 1956년 후반 할리우드 입성 기념작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 [Love Me Tender]가 대 흥행을 기록하고, 동명의 주제가 역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그는 서서히 팝 싱어로 본격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Jailhouse Rock', 'All Shook Up', 'Loving You'와 같은 싱글 히트곡이 이어졌으나 1958년 독일에서 군 복무를 하게 되면서 생긴 공백은 그에게 있어 치명적이었다.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엘비스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한 영국 리버풀 출신의 4인조 비틀즈가 그 뒤를 이었다. 비틀즈의 전성기 동안 엘비스는 다소 사이키델릭하고 소울풀한 음악들을 실험하고 있었다. 간간이 가스펠 음악을 담은 LP를 발표하고, 1968년에는 그의 음악사 후기의 최대 히트작으로 꼽히는 [Elvis In Memphis]를 출시했고, 'Suspicious Mind' 그리고 'In The Ghetto'와 같은 곡을 차트 정상에 올리기도 했다. 1977년 8월 16일, 그가 과도한 약물 복용이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는 의문사로 명을 달리했다. 록 스타 시대의 흐름에 역류하는 스탠더드 팝 발라드 싱어 노선을 고집하고 과다한 영화 출연으로 정력을 소진하는 등, 어느덧 그는 빛 바랜 스타의 반열로 스스로
oimusic 2002년 07월 양중석
백인 취향의 주류 음악에 대안을 제시한 선구자
그는 컨트리와 블루스를 로커빌리라는 스타일로 혼합해서 대중음악계에 선보인 최초의 뮤지션이었고, 백인의 감성으로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노래한 선도적인 인물이었다. 백인 취향의 스탠더드 팝이 득세하던 50년대의 대중문화 흐름은 백인사회가 경멸하던 흑인의 감성을 끌어들여 노래를 부른 엘비스 프레슬리 한명으로 인해 바뀌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구자’였다. (오늘날 에미넴(Eminem) 같은 백인 아티스트가 흑인 음악인 힙합을 하며 화제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에 비유를 할 수 있겠지만 그 파급효과나 인기 면에서 엘비스에 버금갈만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아 왔다. )
미국음반산업협회는 지난 8월 13일 그의 레코드가 미국 내에서 1억장 판매를 돌파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그는 미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골드와 플래티넘 레코드를 보유한 뮤지션이기도 하다. 총 88개의 골드 레코드(미국내 50만장 이상 판매)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 플래티넘 레코드(미국내 100만장 이상 판매)만 45개이며, 22개는 더블 플래티넘(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전체 엘비스 레코드 판매의 40% 이상은 미국 밖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니 전세계 판매고는 예컨대 1억 4천만장은 족히 넘는 셈이다.
받을 수 있었던 셈이고 그러한 로큰롤의 대중화 없이 훗날 레드 제플린과 같은 그룹들이 나타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두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 엘비스는 그 모든 것을 해낸 셈이다(Before anyone did anything, Elvis did everything) 록 스타 미국내에서는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이 엘비스보다 앨범이 많이 판매한 가수이지만, 엘비스가 로큰롤을 성공적으로 대중화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틀즈의 존 레논은 ‘엘비스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라고 말하며 그 영향력을 시인했다. 결국 비틀즈 멤버들도 엘비스의 음악을 들으며 훗날 그들 업적에 대한 동기부여를
Love Me Tender
1861년 "Aura Lee"라는 제목으로 W.W Fosdick 과 George R.Poulton 이 쓴 이 곡은,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 북군측이 즐겨 부른 노래라고 한다. 1865년에는 'Army Blue'라는 새로운 제목과 다른 가사로 바뀌어 West Point의 졸업식에서도 불려졌었다 하며, 1936년에는 영화 "Come and Get It"에서 Frances Farmer가 "Aura Lee"를 불렀었다고 한다. 생애 31편의 극 영화와 2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던 Elvis는 1956년 그의 첫 영화인 "The Reno Brothers"의 사운드 트랙 녹음 작업을 위하여 8월 24일과 9월 2일, 그리고 10월 2일 Hollywood의 Foxstage 1 에서 녹음작업을 하였다. "Love Me Tender"는 8월 24일 녹음을 하였는데, 당시 Elvis의 인기에 편승하여 8월말 영화의 제목도 "Love Me Tender" 로 바뀌게 되었다.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1956년 10월 "Love Me Tender / Any Way You Want Me" 가 싱글로 발매가 되어 5주간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Love Me Tender"는 엘비스의 부인이었던 프리실라가 결혼 전 처음 듣게 되었던 노래로 그녀가 좋아하는 곡이었으며, 1962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Love Me Tender"가 연주되는 담배 케이스를
프리실라가 엘비스에게 선물 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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